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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로마 교황청 성경을 보는 것을 금한 역사2024-01-29 19:56
카테고리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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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고 하여 전권을 행사하여 성경보는 것을 금하고 본인(교황)은 심판받지 아니하고 심판을 할 수 있다고 함...지금도 교회 안 밖으로 이와같은 시도는 계속되어 지고 있다.. 주의하여 살펴야 할 것이다. 

 

---<인용글>----

기독교(개신교)가 1000년의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어두움에서 갈라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른 성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 의식과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천 몇 백 년 동안 성경을 각 나라 말로 번역시키는 일을 금지시켰고,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 당했고, 고문을 당했으며, 교회의 이름으로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교황청, 성경을 금서로 정하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참다운 그리스도교였다면 그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번역했을 것이며, 성경읽기를 권장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평신도들에게 성경읽기를 금지시킨 것은 그들 주장대로 성경 해석권이 남발되므로 인한 성경 권위의 훼손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혼합종교에서 따온 수많은 교리와 풍습들-교회제도, 마리아공경, 고해성사, 사제들의 복장과 치장물, 성자(聖者) 숭배… 등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평신도들이 알게 되고, 교황청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에서 1229년 톨로사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을 갖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당시 로마교회의 금서(禁書) 목록에 성경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의 성경관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의 권위와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말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일반 신자들이 읽도록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교황청의 비성경적 가르침이 성경의 각 나라말 번역과 대량 발간으로 인하여 평신도들이 자유롭게 접하여 읽게 됨을 통하여 밝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읽혀지는 심령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나타났고, 개혁운동은 마른들에 산불이 번져나가듯 순식간에 전 유럽 국가에 파급되어 갔습니다.

 

이에 놀란 로마교회는 1897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황청에서 만들고 인정하는 성경 이외에는 모든 성경을 금했고, 더군다나 개신교의 성서공회에서 발행되는 성경은 일체 읽지 못하도록, 소유할 수도 없도록 엄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에서도 개신교에 의하여 성경이 널리 여러나라말로 번역되고 보급되어 읽히면서 밝히 그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자 할 수 없이 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 미사에 라틴어 번역 불가타 성경만을 읽고 사용하도록 한 규정을 철폐하면서 부터 로마교회 이외의 타국 가톨릭교회에서의 자국말 성경번역이 공식적으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한국 천주교에서도 성경을 국어성경으로 번역하게 되어 평신도들도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천주교도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성경번역금지 조치에 의하여 1784년 전래된 이래 1866년까지 무려 82년 동안 성경의 어느 것도 번역되지 않았고, 1910년 가서야 비로소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번역하였고, 1922년에 사도행전을, 1941년에는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였으나 이러한 로마교황청의 여전한 성경 번역과 평신도 성경읽기금지 조치로 인하여 주로 사제들만 국어성경을 읽고 연구했으며 평신도는 대체로 성경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바티칸 공의 회에서 공적인 미사시간에 라틴어 성경만을 읽어야 한다는 조항이 폐지 됨으로 인하여 한국의 천주교회도 비로소 구약성경 46권을 완역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977년 기독교(개신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경인 것입니다.

 

프랑스 왈도파와 성경 (가톨릭교의 평신도 성경휴대와 읽기금지의 배경)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하기까지에는 그 이전에 수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루터대에 와서 크게 터져 버린 것입니다.

마치 몸에 상처가 나고 그것이 큰상처로 발전되어 큰고름이 생겨서 어느날 터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사람우상집단으로 전락한 것도 하루아침에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로마교회가 600년대까지는 비교적 건전했고 기독교회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데 700년대에 들어서서 로마교회가 세계교회를 다스리는 정권을 로마황제로부터 부여 받고 로마교회의 대주교가 교황(세계교회최고수위권자)이 되어 전권을 휘두르면서 부터 가톨릭교회가 크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섬겨지면서부터 가톨릭교회의 이상 변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즉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성경위에 둠으로서 성경의 내용에 위배되는 여러가지 잘못된 교리와 제도가 생겨나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신앙과는 아주 다른 교회로 변질되어 마침내는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상실한 기독교라고도 볼수 없는 이질 종교집단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천주교가 변질되는 가운데 12세기말(1170)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왈도파의 출현은 최초의 주목할만 한 큰 규모의 종교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고 신앙했던 내용이 오늘의 개신교신앙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왈도파는 12세기말에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서 왈도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그리스도교 개혁운동의 일파를 일컫는 말입니다.

12세기말에 프랑스의 론 골짜기에 있는 도시 리용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상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의 신앙과 체제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1170년경, 두 사람을 고용하여 라틴어로 된 4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 교부들의 글의 요약본들을 로망어(중세기 남유럽 일부지역의 언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평신도로서 처음으로 성경의 이런 번역물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고 굳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번역물들을 읽음으로써, 피터 왈도는 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오직 예수님 한 분의 중보자만이 계실뿐이며, 성례에는 오직 두 가지, 곧 세례식과 성찬식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자숭배,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연옥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왈도는 이러한 진리와 그밖에 이와 관련된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배척하고 성경의 진리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심취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프랑스와 롬바르디(이탈리아 북서지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자신이 읽었던 번역물들의 필사본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설교를 했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곳 저곳 널리 전도여행 다니던 중, 1177년에는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 산맥 기슭의 피드몽 골짜기에서 자신과 같은 생각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같이 오랫동안 거하면서 그곳에서 설교했는데 그들은 곧 자기들의 집단을 왈도의 이름을 따라 ‘왈도파’(Waldeneses) 또는 ‘왈도파 사람들’(왈덴시안들,Waldensians)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 너희는 전도하러 다닐 때에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검소한 옷차림으로 전도를 하러 다니므로서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려지기도 했으며, 나무로 된 신발인 사보트(Sabots)를 신고 다녔다고 해서 ‘사보타티(Sabotati)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전도활동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왈도파 성경교사들이 곳곳에서 로마교 사제들로부터 배척받고 추방당하자, 왈도는 로마의 합법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 번역된 성경등 신앙서적들을 두 사람에게 지니고 가서 교황을 만나게 해서 그 성경과 기독교의 참진리를 교황에게 전하고 승인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170대 교황, 1159-1181)는 그 책들로 인해 야기될 사태를 두려워하여서 그 책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1179년의 제 3차 라테란 공회에서 “알덴시안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의 성직자가 원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왈덴시안들에게 큰 환란이 다가왔습니다.

알렉산더3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루시우스 3세 (Lucius III, 171대 교황/1181-1185)는 왈도파가 자기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왈도파에게 더 큰 제재를 가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왈도파의 신앙생활과 포교를 법으로 금하였습니다.

이후, 왈도파는 공공연하게 박해받게 되었고, 특히, 교황권이 최전성기를 맞은 이노센트 3세(Innocentius III, 176대 교황/1198-1216)때에는 매우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핍박 속에서도 왈덴시안들은 행상을 겸하여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깨달은 진리를 전파하였고, 로마교의 거짓교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왈덴시안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재건을 크게 갈망했기에 신약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였고, 각국어로 번역된 성경 필사본들과 소책자들을 보급하였습니다.

 

왈도파 운동의 주창자인 피터 왈도는 이렇게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217년 보헤미아(체코)에서 소천했습니다.

 

왈도파의 주창자인 왈도가 죽은 후에도 왈덴시안들은 굳게 뭉쳐서 자기들만의 신앙생활을 고수 했으며 열심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핍박을 받으면서도 크게 확산되는 왈도파 운동에 당혹한 로마교 당국은 1229년의 발렌시아 회의(The Council of Valencia)에서 아예 성경을 사제 외에는 읽지 못하게 하는 결정을 내려 버렸습니다. 성경 자체가 금서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1965년 바티칸 공의회에서 사제들만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고 미사에서도 라틴어만을 써야한다는 칙령(규정)이 철페되기까지 평신도들은 성경을 직접 접하여 읽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13세기 중엽부터는 단지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형 처벌을 받고 또한 성경을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는 자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왈도파를 비롯한 반(反)로마교 단체들과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감행된 5-6백년동안의 종교재판의 살육으로 무려 1000만명이상이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 피해 상황에 대해서는 로마가톨리교회의 교권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기록물과 개신교의 교회사책의 내용에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데로 그 숫자를 줄여서 기록하고 또한 개신교인들은 공식적으로 종교재판을 받고 죽은 사람보다 비공식으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감안하여 그 숫자를 늘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종교재판소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1231년에 정식으로 교황직속으로 설치된 이래 무고한 천문학적인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무고한 많은 여인들이 마녀사냥으로 희생 되었습니다.)

 

로마 가통릭교회는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였고, 400여 명의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피신해 있던 동굴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시신은 때로 들짐승과 새들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하였습니다.

 

왈도파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 경우에는, 무차별 살육과 방화를 감행해서, 황폐하게 만들었는데, 왈도파의 본거지인 피드몽 골짜기는 피가 강물처럼 흘러넘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왈도파는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15세기에 이르러는 가장 광범위한 반 로마교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고, 엄격한 도덕률을 고수했으며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이란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신앙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16세기, 종교개혁의 봇물이 터졌을 때, 그들은 보다 적극적이며 안전하게 그들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었고, 종교개혁운동의 선봉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리옹 부근에서 시작해 점차 프랑스 전역으로 세력을 넓혀나가다가 이탈리아·스폐인·독일·헝가리·폴란드 등 인근 국가로 전파 되였으며 로마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등 엄격한 조치로 말미암아 한때 세력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에 흡수되었으며 그 일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국경지대와 알프스의 보도와 계곡에서 자기들만의 신앙을 잘 보존하였습니다.

 

1848년 왈도파는 완전한 시민권을 되찾았고 1855년 토리노에 독자적인 신학교를 세웠으며, 대부분이 우루과이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미국으로 옮아가, 몬태나주에 왈도파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